소개
“근대적 애수의 가장 리얼한 숨결” 정지용을 만나다.
정지용은 한국 근대 문학사의 최초의 모더니스트이자 현대시의 개척자이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된 뒤 줄곧 월북 시인으로 오인되다가, 1988년 4월 공식적으로 해금되었다.
1949년 이승만 정부 시절, 문교부는 정지용이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좌익 필자군에 포함시켜 중등학교 교과서에서 ‹고향› 등 10편의 작품을 모두 삭제했다. 이후 40여 년간 정지용의 주옥같은 시와 문학적 성과에 대한 논의는 모두 금기시되었다.
아티초크는 비운의 시인 정지용의 삶과 문학적 성과를 재조명하고, 젊은 독자를 위해 새로운 감각과 편집으로 «카페 프란스»를 출간하였다. 이번 시선집은 ‹카페 프란스› ‹향수› ‹유리창› 등 76편의 명시와 ‹대단치 않은 이야기› 등 3편의 산문, 40여 점의 삽화와 친절한 해설과 연보로 구성되었다.
‹카페 프란스› 한국 현대시 태동의 전조
한국 현대시는 정지용 이후와 정지용 이전으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그의 위치는 확고하다. 아름다운 이미지와 모국어의 음악성, 정제된 시어로 현대시 확립에 기반을 마련한 정지용은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재학 시절에 발표한 ‹카페 프란스›(1926)로 본격적인 작가 인생을 시작했다.
조선인 유학생 문예지 학조 창간호에 발표한 ‹카페 프란스›는 정지용이 공식 지면에 발표한 최초의 모국어 시였다는 점에서, 근대와 전통이 혼성하는 새로운 시적 형식을 모색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에서 모더니즘 시가 태동하는 전조로 평가되고 있다.
“언어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
정지용은 도시샤대학 졸업 후 1930년대에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유리창› ‹호수› 등 훗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애송시들을 창작했다. 이 시기는 정지용이 구인회(九人會)와 시문학 등에 가담하여 카프의 계급문학에 반하는 ‘순수문학’을 추구했던 때이다. 그는 첫 시집 «정지용 시집»(1935) 출간으로 한국 시단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정지용의 현대시는 그의 말대로 “언어미술”이며, 이 바탕은 감각적이고 토속적인 한국어 특유의 아름다움에 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향수›가 “고향과 조국과 모국어에 바친 최고의 헌사”라고 평가했고, 영문학자 이양하는 정지용을 “조선말의 무한한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알게” 해준 세계문단에 내세울 수 있는 시인으로 극찬했다. 이뿐만 아니라 김기림은 정지용 시의 우수성을 “우리는 항상 그 속에서 떨리는 일종의 영탄의 감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표현했다.
정지용의 아리땁고 슬픈 노래들은 계속된다.
해방 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정지용은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에 관계했다는 이유로 1949년 이승만 정부가 조직한 반공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사상 검증의 광풍 속에서 정지용은 전향 강연에 종사하지만, 좌익 필자군으로 분류된 그의 이름은 1988년 해금 때까지 40여 년간 삭제되지 않았다.
1950년 7월경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정지용은 “[사대]문 안에 갔다 옴세.”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행방불명되었다. 현재 그의 사망 원인은 납북 중에 폭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티초크의 «카페 프란스»는 정지용이 비운의 시인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극적인 삶과 아름다운 시 세계를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아울러 이번 시선집에 포함된 정지용의 주옥같은 산문들과 생생한 사진 및 증언들은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의 시와 삶을 감상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저자소개
정지용은 1902년 6월 20일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에서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어머니가 연못의 용이 올라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지용(池龍)이고, 영세명은 프란시스코다. 정지용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재학 당시 박팔양과 함께 요람동인(搖籃同人)을 결성했다고 전해지며, 1922년 졸업하는 해에 첫 시로 알려진 ‹풍랑몽›을 썼다. 1년 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모교의 교비 유학생으로 교토 도시샤대학에 입학하고, 1929년 6월 논문 ‹윌리엄 블레이크 시의 상상력›으로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유학 시절 가톨릭 영세를 받았고, ‹산엣 색시 들녘 사내› ‹새빨간 기관차› 등 다수의 시를 발표하며 작가로서 성장한다. 귀국 후 16여 년간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영어 교사로 재직하며 사회주의 경향의 계급문학에 반대하는 구인회와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지만 3년 뒤 교수직을 사임하고 서울 은평구 녹번리에 초당을 짓고 은거한다.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49년 9월에 문교부가 선정한 좌익 필자군에 포함되어 중등학교 교과서에서 ‹고향› 등 10편의 작품이 모두 삭제되는 아픔을 겪는다. 1950년 7월경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정지용은 녹번리 초당을 나선 뒤 행방불명되었다. 이후 월북 시인으로 계속 오인되다가 1988년 4월 공식적으로 그의 작품은 모두 해금되었다.